깨달음

<깨달음 강의 16> 16.붓다가 말하는 죽음과 윤회/신(新) 사자(死者)의 서(書) -무묘앙 에오

vision1 2019. 9. 21. 22:24

(깨달음과 관련된 이 강의 시리즈를 올리는 목적은, 수행을 한다는 사람들 대부분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달음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말법의 상태에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그래서 <깨달음이 정확히 무엇인지?>와  이와 관련된 여러 내용들을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자 이 시리즈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이 내용들을 이해하고 자신 안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 vis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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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해탈과 명상과 수행)




16.붓다가 말하는 죽음과 윤회/신(新) 사자(死者)의 서(書) - 무묘앙 에오



<나는 이 우주를 작은 겨자씨로 본다.> - 석가모니/<42장경> 중에서




*<붓다가 말하는 죽음과 윤회> - 무묘앙 에오/<폐허의 붓다> 중에서



당신이 현실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체험하는 경우, 두 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붓다들이 말하는 죽음. 또 하나는 윤회.


실제로 죽는다면, 당신들은 알고 있다. 우선 육체로부터 이탈한다. 그 단계에서 살아있을 때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육체와 물질 세계로의 집착이 끓어오른다. 달관한 듯 보이던 스님도 실제의 죽음 앞에서는 몹시 공포에 떨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죽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고 해도, 다음이 문제다.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의 붕괴가 시작된다. 말하자면 <자신이 죽기 시작한다.> 육체는 죽어도 사고체(思考體)나 개성체는 남는다. 그 사고체와 개성체의 용해가 시작된다. 이 단계에서, 만약 사고나 기억과 자기 동일화를 시키고 있다든지, 개별성으로서의 자신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미칠 정도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사실, 그 정신체 자체가 무(無)로 돌아간다는 불안에 쌓여 있기 때문에, 당신이나 나는 다른 육체로 날아들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보통 일종의 의사적(疑似的)인 거짓 안도감(安堵感)을 느끼게 만드는 시스템이 죽음 직후에 있어서 대부분의 인간을 그 방향으로 유도해 버린다.


만약, 당신이 철두철미 무심(無心)하다면, 어떠한 비전도 없다. 다만, 죽을 뿐. 당신은 단지 허공으로 사라진다. 거기엔 어떤 불안도 없다. 당신은 진정한 자기 집으로 귀환한다. 대해(大海)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 하지만, 만약 무심이 아니면, 자기의 붕괴에 저항하여, 당신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꿈을 마음대로 만들기 시작한다. 죽음의 체험을 하고 돌아왔다는 인간의 대부분이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므로 일곱 번째의 중추에서 나간다면, 사람은 돌아오지 않지만, 죽어서 일곱 번째가 열리려고 하는 마침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은 여섯 번째 즉, 미간의 아지나 차크라에 걸려 버린다. 거기서 꿈, 즉 사고나 이미지에 매달려 생으로 되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참 의미로서의 죽음은 아니다. 사하스라라로 명상을 한 결과, 당신이 수 개월, 수 년에 걸쳐 부상시키려한 것과 같이 정신의 왜곡이나 미련들이 죽음에 직면하는 순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일거에 부상하고 만다. 지금 당신이 살아있을 때 모든 집착을 포기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마찬가지로 포기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들이 말하는 <정말 죽는> 연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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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우주의  무수한 지성, 무수한 생명, 무수한 소위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짐으로써, 마치 사람들은 정말 영혼이 우주를 끝없이 여행하는 듯한 환상적인 꿈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정말 안됐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주적 규모의 의문 부호(疑問符)를 당신들에게 계속 던진다. 요컨대... <좋아, 그래. 영원히 학습하고, 진화하고, 즐기고, 변화를 계속하라. 몇억 겁의 시간을 거친 결말에, 혹은 일 순간에, 당신은 무엇을 위한 진화, 무엇을 위한 우주인가를 물을 때가 온다. 그 때, 당신은 우주가 하나의 모형 정원과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될 것. 거기서 무엇이 행해지는가를 알고, 삶 그 자체, 존재 그 자체에, 절망하는 날이 오게 되겠지. 우주의 무수히 많은 기기묘묘한 세계를 보아라. 당신 지성의 허용 범위를 넘어선 만큼의 광기가 거기에 존재한다. 현실은 도대체 어디인가. 무엇이 궁극적으로 올바른 것인가를 묻는 날이 온다. 혹, 그 날이 오지 않는다면, 당신은 지성이 없는 것이다.


운이 좋아서, 당신에게 지성이 있다면, 마땅히 물을 것을 당신이 묻는 것일 뿐이다. 영원히 즐깁시다... 아무래도 그게 우주인 것 같다. 그런데 왜 조금도 즐겁지 않은 것일까? 그때, 나의 말이 떠오를 것이다. 당신은 이미 한 발 내딛었다. 우주 바깥으로. 지금,당신은 말하고 있다. "우주는 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가?" 당신이 우주 그 자체를 보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에 우주의 바깥으로 끌려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 전부를 보기 위해서는 결국 우주의 바깥에서 보지 않으면 불가능하기에.


그런데 당신은, 바로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가? 당신은 그때 알게 된다. 우주의 바깥, 거기는 정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그곳이야말로, 당신이 진짜로 무한을 알 수 있는 장소. 끝없는 어둠 앞에서 망연자실해질 것이다. 무수한 붓다들이 그랬듯이>.


당신 손바닥 안에 잡힐 정도로 작아져 버린 동그란 우주를 응시하면서 당신은 말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거기로 되돌아오는가? 살아서, 도대체 어찌해야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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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新)사자(死者)의 서(書)>- 무묘앙 에오/<폐허의 붓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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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 아주 큰 성가신 문제가 있다. 이 죽음의 과정에는 두 유형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당신이 밤에 잠들면 두 개의 길이 있는 것과 같다. 하나는 완전한 숙면. 또 하나는 꿈. 죽음의 순간에도 이와 아주 흡사한 일이 일어난다. 순수한 죽음의 길은 숙면과 비슷하다. 그저 사라져 간다. 그것이 해탈이라 불리우는 것이다. 의식이나 사고에 아무런 흔적이 없고 아무런 의문도, 공포도 없다. 그저 사라진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저 사라진다는 것은 결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는다. 당신이 만약 살아있는 동안, 광명,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그저 사라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설령 죽는 찰나에 아무리 쇠약하여 의식이 몽롱했던 병자라도, 막상 육체에서 분리되면, 그 순간 의식은 살아있을 때보다 몇십 배 더 맑아진다. "아-, 아무 괴로움도 없이, 생각하는 것도 없이, 죽었구나" 하겠지만 본인은 전혀 다르다. 그 뒤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밖에서 보고 있는 당신으로서는 알 수 없다. 죽어서, 또는 일시적으로 죽어서, 육체를 분리하면, 그 순간 당신의 온 의식은 생생히 깨어난다. 거기서는 당신이 약간이라도 무엇인가에 걸리는 것만으로, 굉장한 얽매임이나 집착으로 발전한다. 아주 아주 미세한 걸림이어도 그렇다. 마치 당신들이 명상이나 좌선을 하고 있을 때, 때로는 생각이 집요하게 끓어오르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이 100배쯤 증폭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예컨대, 당신은 꿈 속에서는 정말로 무서워한다. 사소한 일이라도 되돌아올 현실이 없는 상황,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사고(思考)의 세계이다. 그저 조그만 집착, 생각, 유감스러움, 그저 희미한 성욕이나 그 밖의 욕망, 그리고 당신이 두려워 하는 것들이, 몇십 배로 확대된다. 죽음이란 환각제와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무엇이든 모조리 확대되어 버린다. 최대의 원인은, 육체라는 안정된 지각과 안정된 이 세계와 단절되었기 때문에, 이미 거기에는 객관적 현실이 없어지고 당신의 사고만이 있는 것이다. 당신은 결코 깨어나지 않는다. 자기가 만들어내는 악몽에서 한 걸음 밖으로 나가버린 것이다. 깨어나고 싶어도 이미 돌아갈 육체는 없다. 당신은 자기 육체가 죽어있음을 보고 만다.


내가 말하는 죽음이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의학적으로 아직 죽지 않은 상태일지라도, 당사자에게 이 <분리>가 시작되면 거기서부터 죽음과의 대면이 일어나는 것이다.


선(禪)에서 말하듯 오로지 죽고,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라면, 우리는 별스럽게 탐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죽을 때 깨달음 속에 있지 않다면, 당신이 꾹꾹 눌러온 온갖 의문이, 무엇이든 전부 일체의 것들이 거기서 확대된다. 당신은 죽음 같은 것을 실감한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리허설이 아니고 진짜이다. 되돌아갈 수도 없다. 상상으로서의 추론이나 반론으로는 이야기될 수 없는 것이다. 깨달음을 체험하지 않고는, 한낱 공론에 그친다는 것을 선의 세계에 있는 당신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실제 먹어보지 않고는 아무리 맛을 설명해도 소용 없듯, 죽음의 과정도 체험 없이는 한낱 공론의 논쟁에 불과하다. 그 진짜 내용은 상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붓다도 말했지만, 우선 제 육체, 제 집, 자기가 정 붙여온 세계에 대한 강한 애착이 솟아난다. 향수(鄕愁)가 100배로 커지게 된다. 그러나 단념할 수밖에 없는 것. 그 때 당신은 예상치 못한 깊은 쓸쓸함을 맛본다. 모두, 모든 것과의 이별인 것이다. 이 행성과도 또는 우주라는 세계 그것과도.


가령 당신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누군가와 헤어질 때 지독하게 슬퍼했던 적이 없는가? 선의 승려에겐 그런 것은 없는 것일까...? 아무튼 좋다. 당신은 죽음에서 삶의 모든 것과 이별하는 것이다. 헤어지는 것이다. 이 행성, 이 대지, 당신이 몇십 년씩 정들여온 육체, 이웃들, 그리고 당신의 정신적 업적... 그 어떤 것이든 모두 다. 그 전부와 영원히 <안녕>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간단히 <자, 죽었어>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어서 무의식이 되는 거라면 아무 문제도 없다. 문제는 죽으면, 무의식이긴커녕 완전한 각성 상태에서 온갖 사고(思考)가 떠오른다. 만약 당신이 뱀을 싫어한다면, 뱀이 천 마리나 몰려들고, 바퀴벌레나 쥐, 거미를 싫어한다면 그런 모든 것들이 당신을 에워싼다. 당신이 두려워하던 것이 당신 주위를 둘러싸고 당신이 조금이라도 애착을 가졌던 것은 당신을 옭아맨다.


죽는 순간의 과정에서 사람은 거의 모두 응석꾸러기처럼 그 본성을 노출한다. 불교에서는 지옥 이야기로만 등장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거기서 자기의 일체를 <거울>에 비춰보게 된다. 당신이 가장 싫어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 좋아하는 것... 그 모든 것이 거기서 펼쳐보여진다.


보통의 경우, 무엇인가 집착이 생각의 씨가 되어, 어떤 방향으로든 마음놓이는 빛에 의해 당신은 유도된다. 당신 생각에야 <아-, 극락에 가는 거겠지>하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영혼의 회수 처리장>으로 보내지는 것이다. 당신은 속아서 태어나게 되는데, 그 책임은 오로지 당신에게 있다. 당신은 태어나고 싶다. 아직 더 살고 싶다고 소원하는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윤회의 코스가 참으로 알뜰하게 준비되어 있다. 인간, 동물, 다른 우주, 다른 차원, 붓다의 세계, 무엇이든 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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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코 당신이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설령 부처가 100억 명 사는 세계라 해도 피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산다는 고뇌>이다.

어떤 세계에서 사는가는 문제되지 않는다. 사는 한, 모양있는 것인 한, 부처도 인간도 살기 위해서는 결코 정지할 수 없고, 영원히 우주가 끝날 때까지 게속 일한다. 또 계속 움직이려면 당신에게는 반드시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살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나 행위. 또 하나는, 그것을 안 하면 당신에게 고통이 생긴다는 시스템이다. 꺼져 사라지는 것을 우주는 허락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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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ON


< 이번 생 동안 많은 깨달은 스승들의 가르침들을 읽고 그 핵심을 이해했으며, 그들이 동일한 가르침과 핵심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이 가르침들의 핵심을 가능한 알기 쉽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이해시키기 위해서 많은 글을 써서 다른 이들과 나누고 있다.저서로는 <알기 쉬운 깨달음>(전자책), <소설 개벽>(전자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