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관련된 이 강의 시리즈를 올리는 목적은, 수행을 한다는 사람들 대부분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달음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말법의 상태에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그래서 <깨달음이 정확히 무엇인지?>와 이와 관련된 여러 내용들을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자 이 시리즈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이 내용들을 이해하고 자신 안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 vision -
(깨달음과 해탈과 명상과 수행)
29.대오와 해탈의 근본적 차이 - 무묘앙 에오
<비교십우도(秘敎十牛圖)>
1(물라다라)→ 2(스바디스타나)→ 3(마니퓨라)→ 4(아나하타)→ 5(비슈다)→ 6(아지나)→ 7(사하스라라)→ 8(완전 해탈의 길과 대오,광명의 길)↔ 9↔ 10(선禪의 십우도의 끝)↔ 11↔ 12↔ 13↔ 14↔ 15
*지구의 선(禪)에서는 10번째 경지까지 밖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제로 이 의식 통로의 정거장은 15번째까지다.8번에 이르기 전에는 나아가는 길은 한쪽 방향이지만 8번 이후는 길을 자유로이 역행할 수도 있고 진행할수도 있다.10번째 단계가 선에서 말하는 십우도의 끝이다.13 14 15 단계의 길은 보통 사람들과 구분이 안 갈만큼 완벽하게 하강하고 있지만 의식은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물질을 조절할수 있는 인종이며 아틀란티스 후기에는 지구에도 있었으나 이 차원의 존재는, 현재 지구에는 60명 정도로 추측된다.바깥 우주에는 무수하게 존재한다.
앞의 그림을 보기 바란다.지구에서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제8도 지점에는 <대오와 해탈의 양다리 길>이 있다.
길 전체 시스템은 15개의 정거장으로 분류된다.일반 선(禪)의 십우도에서는 8이 무(無)고, 9와 10에서 존재로 귀환한다.
인간이 참으로 어리석은 것은 <순번>과 <수치>가 뒤로 갈수록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하지만 실제로 존재로부터의 출구는 제8지점에만 있으며,거기서 여기로 귀환하지 않고 허무로 사라진 사람도 있었다.
한편 그림 9에서 15의 길은 광명으로 변용한 것이며,존재 세계로 귀환하는 것이다.역행하는 길로 돌아가려면, 육체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차원을 상당히 낮추어야 한다.단, 가는 길일 때는 <시점의 방향>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무척 달라질 것이다.
단, 이 두 가지 선택은 <어느 쪽이 좋은가>의 문제가 아니라,그 개체의 자유 의지로 선택 기준을 고르는 문제다.그 곳에 대오와 해탈 어느 쪽이 뛰어나느냐의 문제는 없다.
단순히 사라지는 것은 <마지막>이기 때문에 <최종> 해탈로 불리울 뿐,그것이 최종적으로 뛰어나다는 의미는 아니다.대오와 해탈은 평행선을 달리는 다른 길이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비재(非在)가 좋은 사람은 그곳(無)으로 나아가고,존재가 좋은 사람은 그곳(존재存在)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어리석은 점은 항상 <어느쪽이 궁극적으로 뛰어난가> <어느쪽이 최종적으로 높은 차원인가>를 말한다는 것이다.하지만 대오와 해탈은 <다른 길>이기 때문에 서로간에 우열이 성립하지 않는다.마치 바다가 좋은가 산이 좋은가라는 정도의 차이밖에 안 된다.
단,무(無)에는 우열의 문제가 아닌 특별한 의미에서의 <희소가치>가 분명히 있다.하지만 본인은 존재로부터 사라지기 때문에 본인에게는 그런 가치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무에 대한 가치 논의는 세상에 남은 사람이 논의하는 항간에 떠도는 소문거리일 뿐이다.사라진 자에게는 의미도 가치도 일절 관계 없다.
다만 무(無)로 사라지는 자에게는 원칙적으로 <자격>이 필요하다.그것은 육체의 죽음에 즈음하여 존재를 100% 거부하는 것이다.물론,이것이 꼭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하라.그 선택은 개인의 성질과 경험적 취향에 불과하다.
그러니 해탈과 대오의 어느 쪽이 궁극일까라는 어리석은 우열의 망상을 갖지 말고 우선 대오에 이르면 된다.당신은 그곳에서 질릴 때까지 깨달음을 얻으면 되는 것이다.
대오 또한 간단히 성숙해서 쉽게 끝나지는 않기 때문이다.거기에서 절대 무(無)의 저쪽 편이 어렴풋이 보이는 데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또 깨달음의 광명에 한껏 도취되어도 몇 천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거기에 질렸을 때 처음으로 무(無)와 어떻게 만날 것인지,그곳으로 갈 것인지를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 지금,그것을 당신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대오하지 않고 해탈을 이야기 하는 것은 유치원 생도가 대학 수업에 참견하는 것과 같다.
선(禪)에서는 대다수가 제9~10도의 대오에서 멈추고 있다. 라즈니쉬풍으로 말하자면,그것은 <제6신체>에서 멈춘 것이다.
만약 그 앞의 제8도에서 하강 루트를 선택하지 않고 그 끝의 어둠을 본다면 그들은 쉽게 설법할 수 없다.더 이상 그곳에는 <존재를 위로하는 길>밖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禪)은 전면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그것은 너무나 빨리 제8도의 지점을 통과해 버린다.8도의 지점에 멈추어 <비존재의 영역>을 확실하게 직시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대오자는 설법을 주저하지 않지만 해탈자는 설법하는 일에 주저한다.왜냐하면 해탈은 스스로의 소멸을 용인하지 않는 영혼과 어떤 의미에서 자아가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영혼에게는 쉽게 권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탈에 수반되는 공포>
육체의 죽음은 충격이지만,실제로 죽게 되면 인간은 거의 두려울 게 없다.
하지만 고차원의 신체적 죽음은 그 공포가 육체적 죽음의 100배는 된다.왜냐하면 육체의 죽음에 대한 집착이 형성된 것은(평균 잡아 80년에 죽는다 치고) 80년 정도지만 영혼에 대한 집착이 형성된 것은 몇 십만 년이라는 시간에 걸쳐져 있기 때문이다.그것에 대한 자기 보존욕과 집착은 지독하게 고집스럽다.
따라서 절대 무(無)에 조우했을 경우,그 붕괴에 대한 공포 또한 육체적 죽음과는 <수준이 달라>진다.
당신이 뒤쫓아 체험하기란 어렵지만 그래도 알고 싶다면 이렇게 하라.
바로 지금,그 자리에서 죽으면 당신의 영혼 자체가 두 번 다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완전하게 사라지는>것을 한번 상상해보라.
당신은 아마 지금 시점에서는 이대로 <깨닫지 못해도 할 수 없지,또 다음 생이 있는데>라며 적당하게 넘어가겠지만, 만일 그<다음은 절대로 없다>라면 과연 당신의 영혼과 의식과 존재가 마음 깊이서 <깨닫지 못해도 좋다>고 말할지 어떨지 자문해 보라.이러한 철학과 극단적 논리,또는 무(無)의 실제 체험을 위해서는 당신이 전심전력을 기울여서 <지(知)를 비약시키는 힘>이 필요하다.그것을 궐기 시키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앞서 기술한 것처럼 당신의 영혼 자체가 소멸해서 완전하게 사라지는 것.즉,두 번 다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철저하게 이미지하고 그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 확인과 자문을 반복한다.
2.푸르고 하얀 빛의 구체(球體)가 어둠에 떠 있다고 상상한다.그 내부가 <전존재>다.
당신은 아무리 깨달음을 얻은들 몇 년 간 여생을 편안히 살고 또 다음 차원에 태어난다.바보 같은 말로 사람을 현혹하고 타인의 내부에 갈등이라는 불행과 루슈를 만들어내고 또다시 죽는다.또 태어나서 이번에는 평범하게 생활하지만 만년에는 너무 따분하고 평범한게 싫어서 출가승이 되었고,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또 깨달아 사람을 현혹하고...이하 수억 년...무한히 반복한다.
이것은 전부 존재(存在)라는 구체(球體) 내부의 일이다.그리고 우주는 아무 상처 없이 존속한다.그것을 당신은 밖에서 이미지로 바라보고,그 속에 지금 자신이 있음을 깊이 생각하면서,다시 밖에서 또 그 존재의 구체 전체를 이미지한다.
그 구체의 바깥 측은 <무한의 어둠>이다.결국은 존재라는 점이 있고 그 주변에는 무(無)가 있고 그저 그뿐이다.
구체의 내부에는 온갖 활동이 있지만 그것은 단순한 구체 내부의 일일 뿐이다.당신은 영원히 그 속에 있다.그리고 빠져 나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빠져 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어둠과 <계약>하는 것이다.하지만 거기에는 당신의 절대적인 결단력이 필요하다.거짓은 용서되지 않기 때문이다.또 어둠과 계약해서 바로 사라진다면 좋겠지만 그렇게는안된다.정말 소멸을 원하는지 어떤지에 관한 검사가 개입된다(실제로 그 차원 세계에는 해탈을 재판하는 법정까지 있다.-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은 꼭 믿지 않아도 좋지만).
그 검사중에 하나가 <무한고(無限苦)>다.절대 무의 어둠에 따른 <영혼의 소멸>을 당신은 육체 그대로 체험한다.그곳에서 당신은 죽음과 해탈을,얼마나 어리숙하게 보고 있었는지를 처절하게 느낄 것이다.아마 많은 사람들은,한편에선 싫으면서도 그래도 사라지는 것보다 아직은 낫고 조금 더 참을 수 있을 것 같은 존재의 구체 내부로 도망쳐올 것이다.그 구체의 존재 내부에 있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람만이 어둠과 계약할 수 있다.그리고 이 또한 무의미하게 소멸한다.
<소멸할 때의 감정>
또 한가지,해탈을 동경하는 사람들에게 재차 강조한다.
해탈에 있어서 두 번 다시 존재하지 못하는 것은 당신 <단 한 사람>뿐이다.즉,당신의 이웃과 친구,이 세상 사람들은 여기에 남는 쪽을 선택한다.당신은 절대<고독 속에서> 오직 홀로 사라지는 것이다.
당신은 단순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즐겁게 윤회를 반복하는 당신의 가족과 친구와 무수하게 남는 사람들,존재물들에 대해 영원히 마지막으로 <안녕>을 고한다.
최후의 소멸에는 존재물과의 <이별하는 슬픔>이 수반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그 절대적인 고독감,그 처절함은,그야말로 감정이 갈가리 찢기고 날아가버릴 정도다.
<소멸될 각오가 있는가>
이처럼 우주는그 어떤 의미나 우주 정신이 외부에서 우주를 감싸고 있는 것은 아니다.우리들이 부여하는 우주의 의미나 종교적인 구실도 단순히 존재 우주의 <존속에 기여하는 연료> 조각 하나에 불과하다.하지만 사실은 절대 무의미의 <어둠이야말로 유(有)를 둘러싸고 있으며>,의미와 가치의 유효성은 존재 <내부>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니 이 문제와 다음의 1~6의 문제를 몇 번이고 생각해보기 바란다.유(有)라는 문제가 있고 무한의 무(無)가 그 배경에 있다.<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이는 존재의 근본 문제다.
1.당신이 적당하게 대오를 얻었다 한들 윤회는 계속된다.그리고 무의미한 존재도 계속된다.그래도 좋다면 그리하라(그것이 나쁘다는 근거는 없기 때문이다).
2.그곳에서 빠져 나가는 방법은 어둠과의 계약이지만 당신이 진심으로 바라지 않는 한 그것은 일어나지 않는다(단,진정으로 마음에서 바란다면 그것은 간단하게 얻어진다).
3.진심으로 해탈을 바란다면 존재 전부를 <완전하게 끝내기> 위한 논리적 배경 또는 경험적 배경이 반드시 필요하다.이는 즉,<필요성>과 관련된다.
4.소멸에 대한 의지를 검사하는 한 가지 항목으로서 영혼의 분해에 이르는 고(苦)의 세례가 있다.
5.또 한가지 검사 항목은 존재 전부와의 영원한 이별이라는,생명이 경험할수 있는 한도에서 최대 크기의 고독감(외로움) 세례가 있다.
6.이렇게까지 하면서 해탈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당신에게 있는가?
*나에게는 있었다.나의 소멸에 대한 바람은 모순없는 순도였다.단,분해되는 것에 대해 세포가 가진 본능적인 저항과 영혼의 거대한 두려움이 있었고,강력한 고립에 대한 고독감도 있었지만 <차라리 존재로 돌아오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지만 대오도 쉽지는 않다>
해탈 문제는 이제 그만두고,당신이 광명으로만 노선을 정했다고 치자.그러면 그걸로 아무 문제가 없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엄청난 해탈의 길에서 대오,광명이라는 부드러운 노선으로 바꾸었다고 해서 도가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며, 어려움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해탈에서는 존재 우주자체에 대한 근거로 부정론이 필요하지만 대오,광명으로 나아가는 경우에는 어떨까?
이번에는 <자아의 완전 부정>과 <소위 인간님>이기를 그만둘 결단이 필요하다.즉,변용에 있어서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일은 결코 없다.
해탈할 때는 전 존재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것이 그 대가의 지불이지만,광명은 지독한 아픔을 수반하면서도 사라져야 할 것이 나타난다.
둘 다 당신이 무언가를 크게 잃게 된다는 사실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
해탈에서 광명으로 바꾼들 결국 <고제>의 필요성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즉,당신에게 고(苦)가 없다면 변용은 불가능하다.
해탈은 존재 자체를 고로서 인식한데서 태어난 것이라면,광명은 자기 자아의 한계에 대한 철저한 혐오,자기 마음의 추태에 대한 혐오 또는 자기 마인드가 방해되는 것을 통감한 고가 필요성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만약 당신에게 <이것조차 없다>면,당신은 길을 걸어갈 자격 자체가 전혀 없는 것이다.왜냐하면 자아(自我)도 당신에게 고가 아니며,사고(思考)도 고가 아니면,당신은 지금 이대로 대충 만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심 <이제 이대로는 자아로 살든 사고로 살든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괴롭다...날 버리고싶다>고 말하는 사람이라야 어떤 문이든 도(道)의 문을 두들기기 때문이다.
행법에 대한 <호기심> 정도로는 단언컨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고를 실감할 필요도 없이 대오할수 있다고 가정하면,이미 무명암에서는 <착실하게 행법을 계속한 자>라면 1년 정도에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간단하게 행법이 당신을 이끌지는 않는다.그 이유는 간단하다.
철저한 두정유의는 언젠가는 당신의 자아의 죽음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그때 결국 스스로 <자아를 버릴 마음이 애초부터 없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행법을 시작하는 사람이 무명암에는 꽤 많았다.특히 두정 유의의 경우,만약 진짜 3분 정도 완전하게 유의를 유지할 수 있다면,당신의 자아는 거기에서 질식당할 것이다.
라즈니쉬가 말했다."만약 당신이 시계의 초침을 딱 1분 동안 노마인드로 정말로 그저 무심히,사고 없이 바라볼 수 있다면 당신은 광명을 얻었다고 말해도 좋다."
그러니 그렇게 완전한 두정 유의 그대로 앉거나 누군가와 이야기를 해보라.<대충하는 유의>가 아니라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두정 유의를 한 채 그대로 있으면 당신의 자아는 나올 순서를 잊어버리고 자아 자체의 존속조차 위험해진다.그때 당신의 자아는 그렇게 잠자코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자아를 버리고 싶은 생각이 <절실했던 수행자>라면,그곳은 <비약의 기회>가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자아가 계속 재발하는 것>으로만 끝난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유의(留意)도 철저하지 않고,행법도 게을러지기 시작하며 타인과 말을 해도 부주의한 채 아무일도 일어나는 일 없이 2년이고 3년이고 쓸데없이 허비하는 것이다.
나는,실습자가 진지하게 수행해도 대오자(大悟者)가 나오지 않는 원인은,<변용을 원하는 발심(發心)의 진지함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행법이 당신을 이끄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만약 당신을 진실로 이끌어 주는 것이 있다면,그것은 나와 행법이 아니라 당신의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당신에게 심리적인 고를 가져오는 상황 그 자체일 것이다.고가 없으면 당신이 자신에 대해서 이러니저러니 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필요성이 없다면 행법은 기능하지 않는다.
만약 그 어떤 변용의 국면도 나타나지 않은 채,행법이 시작된 지 반년 정도 지나면 그 시점에서 당신은 그만 내려오는 편이 좋다.
고(苦)의 절실함,진지함,깨달음에 대한 갈망만은 어느 절에서든 중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질>이며 <입문 자격>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무명암에서 파문당한 최대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변용에의 갈망과 자기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苦)의 부족 때문이었다.
그것 없이 무엇을 한들 <어느 방편>에 입문한들 아무것도 안 일어난다.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해탈이라면 당신이 그 도를 바라진 않더라도,다른 한편의 대오,광명에서는 자아의 완전한 죽음만큼은 <천연덕스럽게 바라기만> 하지 말고 당신이<나서서 자기 자아의 죽음을 바라는> 것이어야 한다.
- <반역의 우주>중에서 - 무묘앙 에오 -
VISION
< 이번 생 동안 많은 깨달은 스승들의 가르침들을 읽고 그 핵심을 이해했으며, 그들이 동일한 가르침과 핵심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이 가르침들의 핵심을 가능한 알기 쉽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이해시키기 위해서 많은 글을 써서 다른 이들과 나누고 있다.저서로는 <알기 쉬운 깨달음>(전자책), <소설 개벽>(전자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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