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한국 불교인들이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깨달음과 해탈

vision1 2022. 4. 3.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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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해탈과 명상과 수행)

 

 

깨달음과 해탈은 마음(사념)이 완전히 쉬어서 마음(사념)이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 들었을때 자신 안의 내면의 저 너머 불성(본래면목,주인공)의 자리에 드는 것을 말합니다.

 

형체도 없고 무한하며,나도 없고 너도 없으며 어떤 대상도 존재하지 않고,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우주를 초월한 영원불멸의 신묘한 의식의 자리.

 

당신들이 어떤 수행을 하든 결국 최종 종착지는 마음(사념)이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석가모니의 근본 가르침이 아닌 후대에 만들어진 엉터리 대승교리 개똥철학에 세뇌된 한국 불교인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평생을 헛짓만 하다 가고 중생들을 함께 거짓말 구렁텅이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이해하는 한국 불교인들이 거의 없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부디 이 말을 알아듣는 한국 불교인들이 많이 나와서 한국 불교가 엉터리 대승교리에서 벗어나서 개벽하기를 바랍니다.

 

 

 

<아난아! 만약 모든 세계의 온갖 것 가운데 풀잎이나 실오라기까지라도 그 근원을 따져보면 모두 본체의 성질이 있으며,비록 허공까지라도 이름과 모양이 있거늘 더구나 청정하고 오묘한 밝은 마음은 모든 마음에 본성(本性)이 되거니 어찌 실체가 없겠느냐?> -석가모니- (능엄경 중에서)

 

<일체법(불성) 안에는 나도 없고 사람도 없고 중생도 없고 목숨달린 존재도 없다.> - (금강경 중에서)

 

 

 

<달마어록 중에서>

 

 

마음이 움직임을 멈출 때 그것은 열반으로 들어간다.
열반은 바로 텅 빈 마음이다.

 

이 무심(無心)을 아는 것이 곧 부처를 보는 것이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은 피안(彼岸)에 다다른 것이다.

 

그대의 내면에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바깥 세계도 생겨나지 않는다.
바깥 세계와 마음이 둘 다 사라질 때 그것이야말로 참된 견해이다.

 

그대의 마음은 본래부터 텅 비어 있다. 모든 형상들은 환상일 뿐이니 그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대는 모든 장벽을 넘어갈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깨달음에 이르고자 결심했다면 그가 수행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다른 모든 방법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은 곧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깨달음에 이른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슨 수행을 하더라도 헛된 것이다.

 

열반의 영원한 축복이 마음이 쉬는 데서 나온다.
삼계에 태어나는 윤회도 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음은 모든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마음 없음이 곧 모든 것이고, 적멸(寂滅)이 곧 마음 없음임을 알아라.

 

 

 

이 마음(=무심)은 불법의 본성으로 불린다.또한 이 마음은 해탈로 불린다.

그것은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며,신성한 자아이며,불멸이고 위대한 성자다.

 

인연의 조건에서 벗어난 그대 본성의 실체가 바로 마음에 의해서 전달되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바로 열반이다.

그대가 마음을 벗어나 부처나 깨달음을 찾는다면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전에 이르기를 "사람은 항상 자신 속에 부처의 본성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마하가섭도 오직 자신의 본성을 깨달은 것이다.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대는 모든 장벽을 넘어갈 것이다.

머뭇거리는 순간 그대는 마귀의 수하에 떨어질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의 십대 제자 중에서 아난다(Ananda)는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 기억하는데 있어서 제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처를 알지 못했다. 그가 한 것은 단지 공부하고 기억하는 것이었다.

 

모든 고통은 부처의 씨앗이다.고통으로 인해 지혜를 찾는 마음을 내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과 육체는 하나의 밭이다.고통은 씨앗이다.지혜는 그 싹이고 불성은 그 열매이다.

 

삼 아승지겁은 바로 삼독심에 물든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범어로 아승지겁이란 말은 그대가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이다.

부처가 삼 아승지겁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무수히 많은 생각을 의미하는 것이다.

 

육바라밀은 여섯 가지 감각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우리가 바라밀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대는 '피안에 이르는 방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섯 가지 감각에 낀 때를 벗겨 냄으로 해서 육바라밀은 그대를 집착의 강을 건너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해 줄 것이다.

 

계(戒), 정(定), 혜(慧), 삼학을 지키는 것은 삼독심을 물리치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것이었다.


마음은 모든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또한 마음은 피안에 닿아 있는 여울이다.

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자는 그것에 어떻게 이르는 지 걱정하지 않는다.

 

 

 

<유마경 중에서>

 

법의 특징은 고요함에 있으니 욕망의 대상이 아니며, 상대에 의존하지 않으며, 문자로 그려낼 수 없으며, 모든 언어가 끊어진 것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온갖 생각의 물결을 여읜 것입니다.

 

모든 것에 두루 찼으며 허공 같습니다.

 

색깔도 특별한 성질도 형태도 없으며 모든 움직임을 떠나 있습니다.

 

표상하는 것도 없고 심의(心意)라든가 인지(認知)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필연적인 원인도 없고 연(緣)으로써 설정할 만한 것도 없습니다.

 

여섯 가지 감각의 대상에 의지하지 않는 까닭에 부동(不動)이며 머무는 일이 없기 때문에 어디에서 오지도 않고 어디로 가지도 않습니다.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눈, 귀, 코, 혀, 몸, 의지로 도달하는 범주도 훌쩍 넘어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