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관련된 이 강의 시리즈를 올리는 목적은, 수행을 한다는 사람들 대부분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달음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말법의 상태에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그래서 <깨달음이 정확히 무엇인지?>와 이와 관련된 여러 내용들을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자 이 시리즈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이 내용들을 이해하고 자신 안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 vision -
(깨달음과 해탈과 명상과 수행)
25.<작은 붓다의 큰 이야기> 중에서 - 무묘앙 에오
고제의 진짜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들 생명이 무한한 정지(靜止) 상태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들이 늘 그것과 직면하기 때문에 생명은 늘 그곳에서 도망치려고 한다.
절대무의 공간이 우주의 저 멀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신 속>에 있다.
지복 이외의 그 어느 것도 개오의 증표가 될 수 없다.
<필요성> ... 오직 그것만이 <깨달음>을 부화시킨다는 것을.
따라서, 광명으로 가는 비법이란 곧 <필요성>이다.
단언컨대, 자아의 해체나 에고가 사라지길 바라는 <바람>으로는 결코 당신은 해체될 수 없다.
하지만 해체의 <필요성>이 찾아오면 거기에선 해체가 <일어날> 것이다.
사고(思考)에선 <지금 여기에 있다>는 죽는 것과 똑같은 순간이다.
만약 진정으로 철저하게 지금 여기에 있다면 실질적으로는 <전면적인 마음의 죽음>과 똑같다.
관조란 <일어나는 것>이지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앉아 있기란 <인간>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보통 인간의 평균적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즉 <바보의 극치를 달리는> 행법이 등장한다.
사고 자체는 결코 정지(停止)도 정지(靜止)도 하지 않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다.
사고나 정보도 만약 우리들이 <몇 초 동안 먹지 않으면> 우리들은 죽는다.
우리들은 자각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더라도, 텔레파시 영역의 정보를 매초 100개 이상, 늘 신진대사를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이 생존하기 위한 <음식물>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고 차원의 무심은 있을 수 없다.
이 사고(思考)에 대해 대기하거나 기다리는 명상에 의해 사고나 영상이 안 나오는 장치는 간단한 일이다.
그것은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사고가 나설 기회를 지킨다>는 <또 하나의 사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때때로 그 동안에 다른 사고가 나오지 못할 뿐이다.
즉, 무언가를 관조하는 명상에서는 당신은 무심이나 정적이 아니라, 관조하거나 혹은 사고가 나서기를 기다리는 사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잠시 다른 사고가 못 나올 뿐이다.
왜 못 나오는가?
당신은 <자신을 떼밀어버리고 기다려보는 거야>라며 계속 주의해서 지켜보는 <사고를 계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당신의 내면에 계속 자리잡는 <능수능란한 수완가>의 정체인 것이다.
그래서 명상이 끝나도 <당신 자신>은 아무 변화도 느끼지 않는다.
명상하는 동안 또는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만큼은 일시적으로 사고가 줄어드는 <체험>이 있지만, <체험자 자신>에게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의지가 사라지는 것>이 진정한 정적이다.
그것은 사고를 정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명상을 <하고 있는 당신 자신>을 정적으로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당신의 모든 <의지>가 바로 에고다.
지각이 일어나는 순간이란, 실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의식이 대상에게 달려갔다가 다시 두정으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정말로 두정의 한 점에 의식이 움직이지 않으면 지각은 전부 사라진다.
그곳에는 주체라는 지각조차도 사라진다.
이것이 <그저 존재하는> 상태이며 명상에 있어서의 사마디 상태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또, 의식의 완전한 고정 상태는 두정 이외의 부분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단순히 기(氣)의 집중이 아니라, 의식의 운동이 정지해서 두정에 고정되면, 이미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다.
그럴 정도로 깨달음은 단순한 구조다.
진짜로 30초간 그렇게 하고 있으면,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될 것이다.
문제는 전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두려움의 세계에 당신이 몸을 던질 수 있는지 어떤가이다.
어디까지나 (두정)유의에 중점을 두고 동작과 감각에는 중점을 두지 않도록 한다.
이것은 경행(徑行)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조동종과 같이 경행 비슷한 것을 아무리 우아하게 행해도 별 효과는 없다.
이와 같은 알아차림은 비파사나와 마찬가지로 <자아의 주의력(注意力)>이기 때문에 우선 길게 지속되지 못한다는 모순이 있으며, 나아가 주의와 동작이 정신분열적이 되어 노이로제에 빠지는 경우도 많이 보아왔다.
본시 관조의 주체가 에고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주의가 이완될 수는 없다.
경행이나 비파사나에서는 하는 일과 관조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숨막히는 상태가 일어나고 편해지기가 어렵다.
하지만 두정 유의의 경우에는, 하면 할수록 흘러가는 개개의 현상에는 전혀 개의치 않게 된다.
그 때문에 두정 유의가 이루어질 때, 심경이 편안하면 잘된 것이고, 반대로 심경이 혼란스럽다면 유의가 되지 않은 것이다.
그때는 유의해야만 한다는 사고만이 유의가 되지 않는 속에서 버둥거리고 있을 뿐이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자신의 마음이나 감각을 지켜보는 수행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바란다.
감각이나 사고는 유의의 부산물로서 아무것에도 의지함이 없이 행동이나 사고 자체와 <완벽하게 일치되어> 관조가 <이미 일어나 있는> 것이 올바른 상태다.
VISION
< 이번 생 동안 많은 깨달은 스승들의 가르침들을 읽고 그 핵심을 이해했으며, 그들이 동일한 가르침과 핵심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이 가르침들의 핵심을 가능한 알기 쉽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이해시키기 위해서 많은 글을 써서 다른 이들과 나누고 있다.저서로는 <알기 쉬운 깨달음>(전자책), <소설 개벽>(전자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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